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491)
홍매화
홍매화로 부부된 만복과 자실 왜란이 일어 소식 끊기는데…
사람들은 유만복네를 홍매화네라고 불렀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편에 우람한 홍매화가 마당에 뿌리를 박고 있다. 용틀임해 올라가는 몸통엔 군데군데 늙고 병들어 뚫린 큰 구멍이 있어 고매(古梅)의 품격을 보인다. 죽은 듯하다가도 이내 새 가지가 힘차게 늘어져 잔가지로 흩어지며 끝에 달린 새빨간 매화가 회춘(回春)을 노래한다.
봄이 시작될 무렵 홍매 꽃망울이 콩알만 하게 부풀어 오르면 마을 노인네들이 모여든다. 육신이 쇠잔해진 노인들은 회춘하는 매화를 기다리며 자신을 위로한다. 만복이는 사립문을 잠그지 않는다. 안마당에 들어와 양지바른 툇마루에 자리잡은 노인네들은 새파란 하늘과 새빨간 홍매에 가쁜 숨소리로 감탄을 쏟아낸다. 어둠살이 내리고 초생달이 떠오르면 마고자를 입은 몇몇 노인네가 홍매 암향(暗香)에 취하려고 또다시 툇마루에 걸터앉는다. 집주인 만복이는 작년 하지 때 홍매실에 안동소주를 넣고 익힌 매화주를 들고 나온다.
만복이가 열일곱살 적 아버지 임종을 지키고 있을 때다.
“만복아 조상 대대로 내려온 홍매화를 잘 돌봐라.”
만복이는 선친의 유언을 잘 지켜 홍매화에 지극정성을 다했다.
마을 노인네만 400년 된 홍매화의 회춘 기운을 받는 건 아니다. 어느 날 젊은 아낙이 장옷으로 온몸을 가리고 담 밖에서 하염없이 홍매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만복이의 권유로 마당에 들어와 툇마루에 앉은 아낙네는 홍매를 보며 넋을 잃었다. 이튿날 아낙네는 보자기에서 지필묵을 꺼내 홍매를 그리기 시작했다. 밖에서 그림을 그리기 불편해 보여 만복이는 아낙네를 건넌방으로 안내했다. 건넌방은 깨끗하게 정돈돼 있고 아낙네가 들창을 여니 홍매화 가지가 코끝에 닿았다. 아낙 화백인 오자실은 오 진사의 외동딸로 스물한살의 청상과부다. 3년 전 시집간 그해에 신랑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 별당에서 사군자를 치며 슬픔을 감췄다. 홍매화에 관한 소문을 듣고서 몸종을 데리고 산 넘고 다리 건너 만복이네까지 찾아온 것이다.
어느 날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자실의 아버지 오 진사가 만복이네로 찾아왔다. 툇마루에 앉아 고개를 드니 오 진사는 홍매에 넋을 잃었다. 그는 만복이가 쟁반에 차려온 매화주를 세잔이나 연거푸 마신 뒤 만복이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만복이는 청상과부인 자실과 춘삼월에 조촐하게 혼례식을 올리고 가시버시가 됐다. 꿀이 흐르고 깨가 쏟아졌다. 아들딸을 하나씩 낳았다. 신랑 신부는 남의 이목도 아랑곳없이 장날이면 손을 잡고 장터에 가 주전부리를 하고 너비아니를 사 먹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 오 진사는 죽고, 만복이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다. 왜군이 물러나 세상은 다시 조용해졌다. 봄이 되니 홍매화가 어김없이 폈고 하지가 지나니 매실이 발갛게 익었다. 임진왜란에 휩쓸려간 신랑은 소식이 없고 매실주가 익어도 같이 마실 사람이 없다. 그러나 자실은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 없었다. 아들딸은 자라는데 왜란 때 친정도 망해 매일 끼니 걱정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하고도 3년이 더 흘렀지만 워낙 동네가 작아 무엇 하나 변한 게 없었다. 조용하던 동네에 웬 낯선 사람이 나타나자 개들이 컹컹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홍매화 나무를 하염없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몰골이 말이 아니다. 피골이 상접하고 옷은 남루한 데다 목발을 짚고 한쪽 다리를 질질 끌었다. 매일매일 나타나 마당 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산속에서 잤는지 옷에는 가랑잎이 묻어 있었다.
집엔 마흔 줄에 접어든 안주인과 훤칠한 청년, 혼기가 찬 아가씨, 그리고 제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떨어질 줄 모르는 대여섯살짜리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가씨가 찐 감자와 물 한사발을 쟁반에 담아왔다. 매화나무 가지 아래 양지바른 흙담에 등을 붙여 앉은 나그네는 그걸 받아 조용히 먹었다. 허겁지겁 삼키지 않고 품위를 지켰다. 어둠살이 내릴 무렵 수염을 기른 남자가 집으로 들어오자 어린 딸아이가 뽀르르 달려가 “아버지”라며 품에 안겼다. 안주인이 나오자 털보 남편은 옆구리에 낀 보자기를 건네며 “오늘 화방에서 그림 두점을 팔았소. 당신의 홍매조도(紅梅鳥圖)는 좋은 값을 받았소”라고 말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나그네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남루한 나그네를 두번 다시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