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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82머리를 올려주다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82머리를 올려주다

팔도강산 누비는 노름꾼 ‘장보’, 벌교 노름판서 끗발이 오르는데…

팔도강산 노름판을 찾아다니는 전천후 노름꾼 장보는 이레째 벌교에 파묻혀 있었다. 황 대인의 사랑채에서 불이 붙은 마작판은 한장 터울이 지났어도 끝날 줄 몰랐다. 판이 커졌다. 장보는 남도에만 오면 끗발이 올라 이번 벌교 노름판에서도 싹쓸이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선주 우 생원이 “한식경만 기다리시요잉, 판을 접으면 살인이 날 거구먼” 하며 겁박을 주고 급전을 구하러 부리나케 노름판을 떴다. 삼경이 가까워졌다. 곰방대에 불을 붙인 장보도 일어서며 “내 판돈 건드리지 마시오” 하곤 앞 고름을 풀어 젖힌 채 문을 열고 나가 우산을 쓰고 마당을 가로질러 통시로 갔다. 우 생원이 급전을 구해서 돌아왔는데 통시에 간 장보가 나오지 않았다. 그 시간 장보는 통시 들창을 뜯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을 치고 있었다. 허리에 전대를 굳건히 찬 채 맨발로 폭우 속 이십여리를 전력 질주해 조계산 속으로 들어갔다. 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두팔을 벌려 하늘을 쳐다보며 장보는 껄껄 웃었다. 판을 싹쓸이하면 온전히 나올 수 없는 법이다.

허기와 오한이 찾아왔다. 폭우는 그칠 줄 모르고 사방은 칠흑인데 길도 없는 산속을 맨발로 헤매던 장보에게 두려움이 덮쳤다. 목숨을 못 건지면 전대가 무슨 소용인가! 그때 멀리 불빛이 아른거렸다. 장보는 허겁지겁 달려갔다. 가시에 찔리고 발을 헛디뎌 나동그라졌다가 엉금엉금 기어서 사립문에 들어섰다. 덜컥 겁이 났다. 산적 소굴인가? 100년 묵은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하고 있는가? “사, 사람 살, 살려주시오.” 불이 꺼지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구세요?” 여인의 목소리였다. “길을 잃었구먼요. 하룻밤 유하게 허락해주시오.” 장보는 애원을 하면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들어오세요.” 보이지 않는 주인 여자의 목소리에 귀기(鬼氣)가 서렸다. 돌아서서 도망을 가려고 해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노름꾼의 결기가 솟아올랐다.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더듬더듬 깜깜한 방에 들어가니 장마철에도 군불을 지펴놔 와들와들 떨던 한기가 사라져 살 것만 같았다. 문을 닫자 빗소리와 계곡 물소리가 한결 조용해졌는데 이번엔 침묵이 장보를 미치게 했다.

“이 늦은 밤에, 이 장대비 속에, 이 깊은 산속에 어쩌다가 길을 잃었는지는 모르겠소만 끼니는 때우셨는지요?”

여인의 목소리는 쟁반에 옥구슬 구르듯 청아했다. 장보 대신 “꼬르륵~” 하고 배가 대답을 했다. 여인이 소쿠리에 담아온 삶은 감자를 장보는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칠흑 속에서 여인은 능숙하게 움직였지만 장보는 봉사였다. “불 좀 켤 수 없으신지요?” 장보가 묻자 여인은 말했다. “불씨라고는 호롱불이 전부였는데 문을 열자 불이 꺼졌고 부엌에서 부싯돌을 켰지만, 워낙 날씨가 눅눅해서….”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소찬이 워낙 부실해서 미안허구먼요. 혹시 약주를 하시는지요?” “네, 네.” 약주라는 소리에 장보는 저절로 대답이 나왔다. 호리병에 술을 들고 왔지만, 뭐가 보여야 따르지. 그때 돌돌돌 술 따르는 소리가 나더니 장보의 손에 술 종지 잔이 쥐어졌다. 단숨에 마셔보니 머루주였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술이 있었던가. 여인이 따라주는 술을 거푸거푸 마셨더니 취기가 오르고 담이 커졌다. “낭자는 이 깊은 산속에 혼자 사시오?”“그렇습니다” “식구들은요?”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여인은 조용히 “약주 맛이 어떻습니까?”라며 말 물꼬를 돌렸다.

“내 평생에 이렇게 감칠맛 나는 술은 처음입니다.”

‘귀신은 아니지요? 100년 묵은 여우도 아니고?’ 이렇게 물어보려고 하다가 장보는 참았다.

“과객께서는 어인 일로 어디를 가다가 이 산속을 헤매게 됐습니까?”

장보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여인도 ‘도적은 아니지요?’ 물어보고 싶은 걸 참았다. “누추하지만 아랫목에서 주무십시오.” 장보가 뜨뜻한 방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폭우 속에서 목숨만 살려달라 애원했는데 목숨이 살고나니 하초가 뿌듯해지며 살려달라고 장보한테 매달렸다. 윗목에서 부스럭부스럭 여인이 옷을 벗는 소리가 났다. 조용해졌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던 장보가 기어서 윗목으로 갔다. 꼴깍 침을 삼켰다. 큰돈이 쌓인 마작판에서 후를 부르려고 패 한개를 버리고 한패를 가져오려 할 때 두근거리는 가슴, 터져버릴 것 같은 가슴, 그래 이거야! 여인의 종아리에 입을 맞췄다. 장보의 입술은 엎어져 자는 여인의 무릎 안쪽까지 올라갔으나 고쟁이가 걸리지 않았다. 장대비는 끝없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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