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에세이
할머니와 순이
병풍처럼 둘러싼 산자락을 품으며
옹기종기 모인 마을엔
가족 없이 외롭게
홀로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돌봐줄 이 없고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어
적적함이 친구가 된 지도 참 오래인 것 같은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허망하게 보내고
딸마저 6년 전에 사고로 잃어버렸답니다
선천적으로 말을 못 하고
듣지도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옆집에서 새끼 강아지를 키워보라 준 것이 인연이 되어 반려인과 반려견으로
한 지붕 가족이 된 지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홀로 지나는 삶 속에
모든 게 희미해지고
만져지는 것조차
혼미해지는 인생길에
동행하는 이가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기에
할머니는
가슴에 묻은 딸이 살아온 거라 믿고
이름을
“순이”라고 지었답니다
수많은 생을 거치면서
어느 시간대
어느 공간에서 만나
함께 해온 존재 같았기에
서로 힘들 때 곁에 있어 주면서
같은 기억을 간직하고
같은 믿음으로 함께하며
말없이 전해지는 느낌만으로
기대며 위로가 되는 사이로
함께 하는 그들만의 동행
이젠 순이 없이는
할머니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화장실 가는 일 ”
“밭에 나가는 일 ”
“슈퍼 심부름하는 일 ”
까지
못하는 일없이
할머니의 손과 발이 되어주니까요
오늘은
아침부터 바람이 몹시 불더니
친구인 비까지 데리고 왔서인지
차가운 방바닥에
누워만 있던 할머니에게
위급한 상황이 생기고 말았는데요
할머니 얼굴에 다가가
문대고 짖어봐도 숨소리밖에
내쉬지 못하는 걸 알고는
순이는 어디론가 뛰어가더니
이장님 바지를 물고 할머니가 있는 집으로 이끕니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있는 틈 사이로
응급차에 실려 가는 할머니를
끝까지 따라가는 순이는
도착한 병원 앞에서 꼼짝하지 않고
문에서 나오는 사람들만 바라보며
비가 오나 바람 부나 앉아만 있습니다
그렇게
마주친 어쩔 수 없는 슬픔 위로
목젖에 걸린 아픔을 내보이던 시간이 흐른 지 3일째 되던 날
병원 문으로 걸어 나오는 할머니를 본
순이는 하늘을 걷는 듯 꼬리를 흔들고 쫓아갑니다
그렇게
안기고 문대며
할머니와 순이는 서로의 눈물길 따라
그리움을 만난 듯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흐뭇한 미소로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창틈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침이 오자
함께 시장을 간 할머니와 순이는 그만 길이 엇갈리고 말았습니다.
서로를 애타게 찾아 헤매었지만
할머닌 말을 할 수 없으니 순이를 부를 수 없었고
순이는 멍멍거리며 할머니를 애타게 찾고 있었지만 듣기까지 못하니 헤매기만 할 뿐이었죠
지친 노을이 밀어줘서일까요
지팡이를 앞세우고 너털 걸음으로
마을 동구밖에 들어서는 할머니를
언덕 위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순이는
마치 구름 위를 걷듯 하얀 눈망울 걸음 삼아 한걸음에 달려옵니다
애탔던 시간만큼
서로를 안아주고 있는
할머니와 순이를
귀가를 서둘러던
노을이 포근히 감싸주고 있었습니다
달빛이
앞마당을 노랗게 물들이던 날
할머니 지팡이에 작은 방울이
달렸는데요
“딸랑… 딸랑 “
이젠 방울 소리는 할머니가 되었답니다
순이는
할머니가 앓아눕기라도 하면
아프지 말라고 멍멍 짖습니다
할머니는 답을 합니다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는
말을
방울 소리로 화답을 하면서
할머니와 순이는 오늘도
쓸쓸함을 비우고
외로움을 지우기 위해
대청마루에 누워
담 넘어 먼 세상 나들이를
하는 중입니다
할머니 어렸을 적 가방 메고 학교 다니던 날 ..
꽃다운 나이에 결혼하던 날 ..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없이
가시던 날..
긴 얘기 전화는 할머니 옆에서
대화가 필요하면
사랑으로 포용하고
침묵이 필요하면
말 없는 헤아림을 안식처로 삼고
서로를 갈구하는 날들을 모아
그들은 고단한 인생길에
고마운 관계가 되어
이젠
영혼마저 닮아있는
동반자가 되었답니다
인생 여정의 길을
더 오래 손잡고 갈 거라는
말 없는 약속을 하면서 말이죠…
행복과 불행은
함께 온다고 누가 말했을까요
오고 가는 계절을 따라다니시는 게
힘이 드셨던 할머니가 말없이
하늘나라로 떠나시던 날
장례를 치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모여 의논을 합니다
순이를 이장님 집으로 보낸 뒤
마을 위 뒷동산에 묻으러 사람들이 관을 이동해 묏자리에 입관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 순이가 숨을 헐떡거리며
마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순이는
냄새로 제주인을 알아내고는
관속으로 녹아들려는 듯 온몸을 내맡깁니다
할머니의
첫 번째 문상객
“순이 ”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거라는데
본능만큼
정확한 진심이 없듯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우정
말로도 전달할 수 없는 것까지도
위로와 위안을 주는 감정의 동반자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할머니와의 따뜻한 추억들이
순이의 기억에 영원히 함께하기에
오늘도
할머니가 묻힌 자리에서
그 곁을 떠나지 않은 채
바라만 보고 있는 순이가
전하고 싶었던 그 말은……
“나는 당신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가 아니었을까요
출처/노자규의 골목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