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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사 에 대한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집필한 송호종 박사님

2015 1028 처음 읽는 부여사

‘고조선 1호 박사’로 더 유명하신 송호종 박사님께서 집필하신 책.. 부여는 기원전 3세기부터 494년까지 존속한 예맥족이 세운 국가라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발해건국의 주요세력이 부여와 관계가 깊을만큼 우리 고대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부여는 ‘사기 129권 화식열전’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대략 한나라가 흉노의 동쪽땅을 평정한 기원전 119년과 한사군을 설치한 108년 사이에 건국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부여’라는 이름은 ‘평야’라는 ‘벌’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사슴’을 일컫는 만주어인 ‘부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평지가 많아 농경에 유리했고, 좋은 말과 보옥이 많이 나는 지역이어서 부유하였다고 한다..

건국신화에 따르면 ‘탁리국’에서 남하하여 ‘부여’를 건국하였으며, 동족인 고구려와는 건국초기에는 우호적이었지만 급속도로 고구려의 세력이 팽창하자 태자를 볼모로 잡으며 견제하다가 유리왕 32년 (서기 13년) 학반령에서 고구려군 매복에 대패하고, 대무신왕 5년 (서기 22년) 국운을 건 남부 국경 전투 중 부여 대소왕이 사망하자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에 투항하여 국력이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2세기 이후 급성장하는 고구려가 요동쪽으로 진출하려하자 후한과 연합하여 견제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285년 선비족 모용외에게 수도를 함락당하고 1만명이 포로로 잡혀갔으며, 4세기 초 고구려의 침입과 346년 전연의 모용황에게 공격당해 국왕 ‘현’과 백성 5만명이 포로로 잡혀가면서 거의 멸망단계에 이르게 되어 문자왕 3년 (서기 494년) 물길족의 저항을 진압하지 못하고 왕족들이 고구려로 투항하면서 부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랜 역사서인 ‘삼국사기’에서는 ‘삼국’의 역사에 주안점을 두어서인지 부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지만, 민족자주성과 문화의 우위성을 내세우려는 ‘삼국유사’에서는 비중있게 다루어졌다고 한다..

조선초기 사대부들의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저술된 ‘동국통감’에는 기자-삼한-백제/신라/가야로 이어지는 남방계 문화와 단군-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문화에 대한 기술은 있지만, 부여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 이르면 ‘상처입은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환으로 역사서가 활발하게 편찬되었으며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와 허목의 ‘동사’에서 중국에 예속된 역사가 아닌 독립적 역사관이 피력되며 부여의 비중이 늘었다고 한다..

실학자 중 ‘아방강역고’를 저술한 정약용의 경우, 북학파가 믿던 요사계통을 통렬히 비난하면서 고대사의 중심을 반도로 국한하였다.. 그는 한국사의 주요 종족을 북방의 조선족과 남방의 韩族으로 여겼으며, 고구려와 부여를 ‘북적’ 계통의 천한 종족(그들을 Zerg 취급하시다니.. ㅠㅡㅠ)으로 간주하였다고 한다..

민족주의적이며 주권회복에 대한 의지가 강렬했던 일제강점기에는 ‘독사신론’, ‘조선상고사’와 같은 책에서 신채호는 기자-마한-신라로 이루어진 韩族 중심정통론을 부정하며 ‘부여 주족론’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최근 중국에서는 동북공정과 관련하여 부여사를 고구려사처럼 중국 동북사의 일부로 간주할 뿐 한국의 고대사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동북공정은 끝났지만 ‘랴오허 문명론’과 같은 기획시리즈(?)를 통하여 자국역사 편입의 초석을 다지고 있다고 한다..

역사.. 중요하다.. 과거의 한 국가인 ‘부여’를 가지고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도 판이하게 다른 해석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역사’라는 것이 ‘과거의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는 있지만 ‘현재 상태를 투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부여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현재 남한과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랑캐(?)임에도 풍부한 물산과 재화를 바탕으로 700년간 중국과 평화관계를 유지하고 서쪽의 유목민족이나 남쪽의 고구려와는 대립하면서 번영을 구가하던 국가였던 부여.. 그러나 지방세력을 통합하여 부족연합체로부터 하나의 왕국으로 승격하는데엔 실패하였으며, 자주국방보다는 강대국과의 동맹을 통한 연합방위로 나라를 지키려 하였지만 강대국이 내분과 외침으로 약해지자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였다..

‘부여의 역사’로부터는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부여’라는 국가를 향한 시각이 시대마다 다양하게 달라졌었는데, ‘올바른 하나의 시각’이 가능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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